청흑 전력 60분 107회, 봄비
두터운 옷들을 겨우 벗어내나 싶었더니 지난밤부터 부슬부슬,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에 아오미네는 상자 속을 뒤적였다. 곧 잘 개어 둔 카디건을 찾았고, 그것을 꺼냈다. 엉성하기 짝이 없게 얽히고설킨 카디건은 소꿉친구인 모모이 사츠키가 사춘기 시절 며칠 밤을 새워가며 서투름이란 서투름을 잔뜩 넣어 떠주었던 옷. 물론 제게 준 옷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입고 싶어 아오미네는 눅눅하게 앉은 먼지를 한 번 털어내고 대충 몸에 걸쳤다.
“역시 작네.”
맨 살에 까끌하게 닿는 옷은 떨어졌던 체온을 금방 높여주었다. 하지만 제 옷이 아님을 알려주는 껑충 뛴 소매와 겨우 맞는 어깨에 불편함이 쌓이고 주인에 대한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굴어 결국 벗었다. 아마도 남겨진 미련이라는 것이 헤집고 다녔기 때문일 터. 정리되지 않는 머리가 곧 마음도 흐트러지게 한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까.”
지금 제게 찾아온 자극을 잊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찾던 아오미네는 창 너머를 바라보다 곧 우산을 챙겨들었다.
Rainy Day
; 비 온 다음 굳은 관계
아무런 계획 없이 나온 터라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우산으로 가려진 시야가 더욱 상념에 젖게 만들고 정처 없는 떠돌이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본능에 의지해 걸었다. 그랬기에 조금씩 아는 길로 걷게 되었고 곧 근처가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의 거처임을 알았을 때, 맞닥뜨린 길목. 곧장 걸어가면 그의 집 앞임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곳으로 가려는 아오미네를 차갑게 말리는 이성이 겨우 걸음을 멎게 했지만, 그것은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이별을 경험한 후부터 꾹꾹 누르고 있던 욕심이 한 번쯤은 괜찮지 않냐는 속삭임으로 아오미네를 유혹했고 이미 흔들릴 때로 흔들린 아오미네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가까워지는 목적지에 괜히 손에 땀이 베였고 만약이라는 상황들이 줄줄 꼬리를 물었다. 그것은 설렘으로 가슴을 뛰게 했고 또 걱정으로 바뀌어 머리를 아프게 했다. 끝과 끝을 오가는 감정의 변화 속 걸음은 더뎌지지 않고 오히려 빨라진다.
“······.”
숨이 조금은 가빠질 즈음 도착했다. 매번 헤어지기 아쉬워 서성거렸던 담벼락이 눈에 들어오고 이어 처음 숨결을 나누었던 가로등 아래, 그리고 기대감을 안고 넘었던 대문까지. 밀려오는 과거에 왈칵 감정이 올라왔고 비워진 곁이 내리고 있는 빗물에 잔뜩 젖어버렸는지 사무치게 시리다.
“!”
“!”
“아오··· 미네 군···?”
오는 길에 생긴 걱정은 모두 마주칠 수도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그 걱정이 불러 온 상황인지 정말로 마주쳐버렸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지? 서둘러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다. 잔뜩 무너진 모습으로 청승맞은 꼴을 보이는 건 아오미네 스스로의 자존심이 허락 하지 않았다. 이상의 나약함이 청승맞아 들리지 않은 척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묶이고 말았다. 옛 기억은 물론 옛 추억 그리고 옛 연인에게.
“아···, 테츠.”
“···오랜만이네요.”
다가오는 거리감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부러 빗겨 깔았다. 그 탓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산을 잡고 있는 손을 보게 되었고 이미 그의 옆자리는 채워진 찰나인지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 ······그러게.”
여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저와 달리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첫 사랑. 정말 기억 저 너머로 남겨두어야 하는 상황에 더 이상의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냥. 지나가던 길이였어.”
“···그렇습니까.”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는 새로운 만남을 하고 그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새롭게 펼쳐지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니.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만약이라는 덧없는 희망을 갖게 했고 그럴수록 이미 종지부를 찍은 연인사이임을 통감하게 만든다.
“그럼.”
표현하지 못한 말이 가득해 걸음이 무거웠다. 그만큼 마음 속 깊게 담았기 때문임을 아는 아오미네는 더욱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저한테 정말 볼 일이 없는 겁니까?”
“······.”
“정말··· 정말 그렇게 갈 생각입니까?”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연을 가장한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임을 느낀 것인지 상대 쪽에서 먼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민다. 잡아도 되는 걸까. 이때까지 미루어 본 행동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하게 내밀고 있어주고 있는 손에 아오미네는 좋은 쪽으로 마음이 부풀었고 남아있는 용기를 모두 꺼내 내밀고 있는 손에 깍지를 껴주려니 벌써 상대는 도착해있다.
“당신은 정말 바보입니다.”
“윽, 테츠···”
콩, 하고 부딪힌 가슴팍이 아팠다. 아릿하게 퍼지는 알싸함은 달갑지 않았지만 부비적하며 스며드는 온기가 이어져 금방 잊게 된다. 따뜻함만 남은 공간. 그대로 품에 들어 온 그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안았다.
“매번 이런 식이죠. 내가 왜 카디건을 두고 갔는데! 왜 이사도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작 저기서 여기까지의 거리지만 빗줄기에 젖어 보여주는 얼굴이 엉망이다.
“미안.”
“그렇게 또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정말 미안해.”
다시 한 번 콩, 부딪힘이 일었고 달래는 일에 서툰 아오미네는 계속해서 사과의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제 어깨에 얹은 손의 반지가 보여 그를 잠시 떼어놓는다.
“그렇지만···, 너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야?”
“······너는 정말······.”
“테···츠······?”
“없습니다! 너는 스스로 끼워 준 반지도 기억하지 못합니까?!”
당신은 정말 바보입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하다. 너도 계속해서 제자리였구나. 혼자서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 터져버린 감정 속에는 원망이 많았지만 곧 좋아함으로 바뀌어 가슴에 떨어진다.
“역시 테츠밖에 없는 것 같아. 나는.”
응어리져 있던 감정이 풀어져 더욱 단단하게 서로에 대한 감정으로 굳으니 쉬이 그치지 않을 비 역시 서서히 그쳐간다. 곧 따사로운 해가 살며시 얼굴을 비추며 비 온 뒤 특유의 산뜻함이 가득 머금어진 공기가 온기를 타고 선선하게 불어온다.
“···집으로 갈까? 테츠가 해주는 밥, 먹고 싶다.”
“너는 정말···”
“좋아해, 테츠. 정말로.”
“······나도요.”
완연한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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