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흑전력 60분 217회, 여우비
너른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의 눈부심에 몇 번 뒤척거렸다. 귀가 밝은 동거인이 놓칠리 없는 움직임. 언제나처럼 기운찬 아침인사가 들려오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인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다 지쳐 아래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숨을 죽이고 귀를 예민하게 만든다.
“······.”
잠에 든 사이 잠깐의 외출이라도 한 것인지 들려오는 소리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잔잔한 백음 뿐. 쿠로코는 이 한가한 오후의 시간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늘만은 이 집에서 원래 살고 있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기회. 거기까지 생각하니 감겨오던 눈이 말똥해지고 정신까지도 또렷하게 돌아온다. 조금 더 말끔한 상태를 위해 화장실로 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왔다. 완벽하게 씻지 못한 것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행동을 서둘렀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쿠로코는 그가 마련해준 옷을 벗었다. 그리고 한 쪽에 잘 개어두었던, 처음 이 집에 온 날 입었던, 자신의 옷을 껴입고선 현관으로 내려갔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까치집 진 머리를 꾹꾹 누르는 것도 잊지 않고.
큰 호흡 후 현관문을 나서니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비. 이제 떨어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정도로 점점 그 세기가 강해져 그대로 걸음이 묶여버렸다.
“오늘은 정말 돌아가려 했습니다만······.”
방금까지는 맑았던 청명한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구멍이라도 난 듯 후두둑, 떨어지는 이상 현상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현상이지만, 내리는 이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쿠로코는 감탄사 대신 한숨을 포옥 쉬었다.
“정말 너는 신이 확실하군요.”
오늘도 돌아가는 일은 그른 것 같다.
신과 함께
; 그와 함께 한 순간들
벌써 이 집에 온 지도 한 달 하고도 조금 더. 정확히 센 날짜가 아니었기에 미세한 오차가 있을 순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마만큼 오랜 시간을 집 떠나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꽤나 긴 시간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은 지금쯤이면 함께 살아가던 마을의 누군가가 쿠로코의 부재를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시간. 하지만 오늘도 숲은 평소와 같이 잠잠하다. 새와 풀벌레 따위들의 노래 소리만 가득 엉켜 평화로운 풍경에 문득 제 존재가 이미 잊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기척이 옅어 자주 잊어졌지만 쿠로코 나름대로 마을에서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인사성이 나쁜 것도 아니었기에 이웃과도 원만하게 지냈고 두 달 전 이사 온 제 또래, 카가미와도 친분을 쌓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인지 그 누구도 ‘쿠로코 테츠야’ 라는 사람을 찾지 않았다.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마주하니 입 안 가득 씁쓸함이 밀려오는 터라 냉수 한 잔을 벌컥 들켰다. 그리고 여전히 못마땅하게 쳐다보면서도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남자, 키세 료타에게 컵을 건넸다.
“키세 군도 마실 겁니까?”
“마실 기분 아닙니다.”
나 삐졌어요, 하고 서슴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미운 일곱 살이었지만 실상은 7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온 신이였다. 그것도 맑은 날에 멋대로 비를 내릴 수 있다는 설을 가진 여우 신. 그런 그와의 처음은 오늘처럼 맑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당시 쿠로코는 좋은 볕을 쐬기 위해 가벼운 복장으로 집과 가까운 뒷산에서 산책을 하던 중이었고, 때문에 비를 피할 만한 도구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젖기 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지만 어느 정도 깊게 왔는지 돌아가는 길목이 멀리서 보였다. 더불어 이제 시작된 비는 그칠 기미는커녕 더욱 거세게 내리는 것에 쿠로코는 어쩔 수 없이 파릇하게 자라난 나무들 아래로 숨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잎사귀와 굵게 뻗은 가지에 나무는 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랬기에 쿠로코 홀로만 비를 피하고 있던 나무가 아니었다. 산신이라고 알려진 여우 신, 키세 료타가 진즉 자리 잡았던 나무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쿠로코는 어디에서 스치듯 들었던 지금 내리고 있는 ‘여우비’ 에 대한 설화가 생각나 “여우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라는 실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와 연결고리를 맺어주는 첫 단추가 되어버렸다.
“당신,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네?”
“방금 여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않슴까? 그랬잖슴까!”
“아, 네··· 뭐. 그런 말을 했죠. 그런데 왜 당신이···”
“제가 그 ‘여우’ 니까요.”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이 ‘여우’ 라고 하는 남자를 찬찬히 훑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쿠로코 자신과는 다를 바 없는 사람 형색이라 어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정확하게 꿰뚫은 남자는 “믿지 못하는 검까?” 라는 말과 함께 머리 위로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귀를 내보이고 털이 풍성한 꼬리까지 보여주었다.
“이제 믿습니까? 제가 여우라는 거.”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제 정체를 밝히는 것이 더 의심스러웠다. 어떠한 방법으로 솟게 만들었을까? 사실이 확인하고 싶었던 쿠로코는 계속해서 쫑긋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귀 쪽으로 손을 뻗었고, 곧 그 손은 꼬리에 의해 내쳐진다.
“아···, 미안합니다.”
“인간은 다 그렇슴까? 의심이 많슴다!”
부연설명 없이도 쿠로코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 챈 남자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불쾌함을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쿠로코는 왜인지 억울한 기분이 잔뜩 들었다. 먼저 대화를 이어간 것도 저쪽이고 또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을 억지 부리는 것도 저쪽.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의 쿠로코는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말을 결국 터뜨렸다. 여전하게 불쾌감을 표하는 남자에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말 사람이 그렇게 살면··· 네?”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르는 사람이 여우냐고 하질 않나, 여우처럼 귀와 꼬리가 달린 모습을 보여주질 않나. 제가 의심하는 이유는 당신 탓도 있단 말입니다!”
당황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용기가 났다. 쿠로코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뱉었고 남자는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깐, 이라던지 잠깐만, 이라는 말만 짤막하게 반복 했다. 그에 비해 속이 후련해진 쿠로코는 할 말도 했고 처음보다 얇아진 빗줄기를 보았기에 계속해서 남자를 상대 해 줄 필요가 없었다. 흘낏 본 남자는 제 반격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쿠로코는 이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질게 변한 땅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려고 했다.
“···뭡니까.”
황급히 제 어깨를 잡아 몸을 돌리는 남자의 손이 없었더라면.
“하아··· 정말. 이 모습까지는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잘 보십쇼. 그리고 내가 여우라는 걸 알게 되면 책임져야합니다.”
“잠시 만요. 제가 왜 책임을···”
방금 제가 할 말을 쏟았다고 그러는 것인지 이번엔 제 할 말만 늘여놓곤 남자는 사라졌다. 역시, 눈속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요. 처음 만나는 입장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대화를 시작한 시점부터 쿠로코는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어떠한 방법으로 제 시야에서 사라진 남자를 찾아 그만 자신을 놀리라는 말을 쏘아주곤, 다시는 이렇게 사람을 상대로 장난을 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를 할 심산으로 그를 찾았다.
보여 지던 체격으로는 단번에 먼 곳으로 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젖은 땅에서 움직이면 발자국이 남을 터. 쿠로코는 선명하게 찍혔을 남자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마주했다.
“여우······?”
“이제 믿으시겠슴까?!”
옅은 노란색, 아니 금색이라고 해야 맞을까. 잘 관리되어서 윤기가 흐르고 조그마한 빛에도 반짝거리는 털을 가지고 있는 생물은 분명 여우였다. 그것도 아까 대화를 하던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우. 쿠로코는 정리되지 않는 현실들이 마구마구 달려드는 것이 복잡해 머리를 짚었다.
“괜찮슴까? 이래서 내가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당신 정말···”
“여우임다. 정확히는 여우 신, 키세 료타 라고 합니다.”
제 소개를 한 여우, 그러니까 키세 료타 라는 이름을 가진 여우 신은 처음 만난 남자의 형색으로 돌아왔다. 정말···, 여우였습니까? 얼떨떨함이 더듬더듬 되묻게 했고 신, 키세는 이제야 제 손에 주도권이 쥐어졌다는 것에 만족이 가득 퍼진 얼굴로 속삭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시간입니다.”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허리가 단단한 팔에 감겼다. 그리고 어떠한 저항도 한 번 못해보고 그대로 이 집에 묶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눈이 닿는 곳마다 푸르름이 가득한 산 속은 좋았지만 쿠로코에게는 생활이라는 것이 있었다. 저 마을에서 꾸려가고 있던 생활. 뿐만 아니었다. 신이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감히 어떤 앞날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하루는 돌아가겠다는 말로, 하루는 돌아가겠다는 걸음으로, 또 하루는 만났다는 사실을 가지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때마다 번번이 이기는 쪽은 여우 신, 키세 쪽이었지만, 쿠로코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3일에 걸친 긴긴 싸움으로 키세는 알았다. 이대로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0,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 제안했다.
“딱 한 달. 저랑 같이 살아봐요.”
“싫습니다.”
싫다는 반응이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민도 없이 즉각적으로 나온 부정은 입 안을 쓴맛을 돌게 만든다.
“알아요. 당신이 나와 같이 살 이유도 없고 엮일 필요도 없다는 거.”
“······.”
“그래도, 나는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내 행복을 바래주는 이가 있다는 걸 안 건.”
마주하며 진심을 꺼내는 황색의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대신 외로움만이 가득 차올라 일렁이고 있을 뿐. 쿠로코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키세를 품에 안았다.
“그간 홀로 잘 커왔네요.”
포용력 있는 말과는 다르게 체격 차이 때문에 쿠로코가 키세를 안아주는 것보다는 안겨있는 꼴이었지만, 그래서 좋았다. 키세는 천천히 퍼지는 온기를 놓치기 싫어 제 팔을 쿠로코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제 품의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꽉, 안았다. 쿵쿵.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는 체온이 따뜻하다.
“딱 한 달.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거부할 수 없게끔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체온의 힘은 강했다. 굳어있던 마음을 녹였고 거절만 하던 입에서는 허락의 말을 꺼냈으니.
“···정말여? 정말이죠? 지금 그 말 무르기 없슴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안김을 당했지만 쿠로코는 억지로 키세를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온전히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가만히 있어 줄 뿐.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과의 동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 지붕 살이는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맞춰주는 신의 노력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쿠로코였지만 적응의 동물답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호의에 익어갔다. 그래서 가끔 잊었다. 제가 떠나야 할 시간에 대해. 그랬기에 오늘,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했지만 완벽하게 저지당했다.
“또 생각했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또 읽었죠. 내가 읽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말이죠.”
“그, 그건 다 쿠로콧치 때문···”
“한 달.”
“윽.”
스스로가 판 굴을 밀어보이니 더 이상 부딪히지 않는다. 대신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고 부빗거리며 애교를 부린다. 늘 같은 패턴. 넘어가서는 또 같은 하루를 보내야 했기에 쿠로코는 단호하게 무시했다.
“약속 한 날이 지나서 돌아가겠다는 것뿐인데 언제까지 어리광 부릴 겁니까?”
“쿠로콧치는 나랑 있는 거 좋지 않았어요? 무려 신과 함께 사는···”
“그래서 돌아가는 겁니다.”
조금은 강하게 내쳐야 신과의 인연이 끊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러 모질게 말을 했고 다시 징징거릴 키세의 말에 받아칠 말을 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키세는 아무런 말이 없다. 말에 수긍하는 것일까. 쿠로코는 살며시 시선을 그에게 두었지만 뒤에 위치한 그의 얼굴표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워 몸 전체를 돌려 마주하니 처음 본 얼굴이 있다.
“키세 군······.”
“정말 나 때문에 가는··· 겁니까······?”
말이 꽂혀 들어간 곳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눈물샘까지 파편이 튀었는지 뚝뚝, 큰 눈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눈물이 떨어지고 다시 차오른다.
“나는 쿠로콧치랑 있어서 좋았습니다. 쿠로콧치는 안 그랬습니까?”
“저는···”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는데, 당신은 여전히 나를···”
이후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키세 역시 스스로 단정 짓기 싫어 말을 멎는다.
“그게 아닙니다.”
“······.”
“저도 당신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어떻게 미련 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저도 정리라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왜 정리 한다는 것인지 키세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좋을 때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키세는 여전하게 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물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호수가 펼쳐진 그곳은 키세 료타, 저 하나 뿐.
“쿠로콧치······.”
“그러니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당연히 보내주지만··· 그래도 역시 마을에 있는 것이 좋다고 마음이 바뀌면 어떡함까?”
참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 자신에 의해 생겨난 걱정임을 알고 있기에 쿠로코는 그에게 밖에 반응하지 않게 된 심장 위로 키세의 손을 끌어다 놓았다.
“쿠로콧치?!”
“느껴지십니까?”
“······.”
“이렇게 만든 상대를 두고 어떻게 혼자 살 수 있겠어요.”
쿠로코의 진심이 담긴 불규칙한 고동소리는 곧 키세의 심장 박동수에 영향을 끼쳤다. 누가 더 빨리 뛰는지 모르는 쿵쾅거림. 그대로 입술이 맞닿아 제대로 그들의 마음이 담긴 숨결이 섞인다.
“평생 안 놔 줄 거예요.”
행복에 겨운 숨결이 다시 한 번 섞이고 떨어진다. 붉게 오른 두 사람의 볼처럼 무르익은 하늘은 신이 퍼붓는 애정의 시간을 버텨내지 못하고 서둘러 까만 물감을 퍼뜨린다. 잔잔히 어둠이 깔리고 그 사이에서 가장 환한 빛을 내는 오두막. 그곳에서는 오늘도 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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